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미셸 자르 (문단 편집) === 생애 ~ 1970년대 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i.skyrock.net/3192023675_1_2_zXBHKwXq.jpg|width=100%]]}}} || ||'''1978년 장미셸 자르''' || ||[youtube(Hto-K2EwFt4,width=300,height=100)]||[youtube(W18VtbMEbZ0,width=300,height=100)]|| ||[[Oxygene]](1976) 중 Oxygene Part 4||[[Equinoxe]](1978) 중 Equinoxe Part 4|| [[1948년]] [[8월 24일]] [[프랑스]] [[리옹]]에서 태어났다. 영화 음악가 모리스 자르의 아들로 태어났지만, 5살때 이혼하여 어머니와 지내면서[* 이후 모리스 자르와는 19살때 재회했다고 한다.] 10대 시절에 [[신디사이저]]를 소개받았고, 이에 관심을 보인 자르는 20대 때 파리 음악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[[1968년]]에 [[구체 음악]]의 창시자인 피에르 셰페르가 만든 음악 연구 그룹(GMR)에 합류하고, [[슈톡하우젠]]의 스튜디오에서 일했었다. 이후 [[1969년]]에 작은 신디사이저 스튜디오를 설치하고 첫 번째 싱글 음반인 을 발매했다. 이후 71년에는 발레곡을 작곡하고, [[1972년]]에는 와 영화 사운드트랙 음반인 를 [[1973년]]에 발매하여 상업적으로는 실패했지만, 연극, 발레, 텔레비전, 광고 음악계등에 진출하는 시금석이 된다. 그 결과 [[1976년]]에 발매되는 <[[Oxygene]]>은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게 되었다. 은 처음에는 여러 레코드 회사에 거절당했지만, 자르와 함께 동문 수학했던 다른 샤페르의 제자가 제작자인 남편을 설득한 끝에 앨범을 낼 수 있었다고 한다. 그리고 결과는 대박이었다. 프랑스 음반 역대 베스트 셀러로서 약 1800만 장 이상을 팔아치웠다고 하며, 자르가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끌게 될수 있었던 기념비적인 음반이다. 한국에서는 특히 가 유명한데, 듣는 순간 바로 알아 차릴 수 있을만큼 방송에서 엄청나게 사용되었다. ~~주로 시사나 심각한 소재의 [[다큐멘터리]] 쪽에서...~~ 이후 [[1978년]]에 춘분을 테마로 차용한 <[[Equinoxe]]>를 발매하며, 뮤지션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. , 가 우리에게 친숙한 편으로, 특히 Part 4는 90년대 중반[* 정확히는 1993년 4월 12일부터 1997년 5월 30일까지] 리즈시절 [[뉴스데스크]]의 클로징 시그널로 쓰여서 비교적 젊은층에게도 인지도가 높다. 만큼의 엄청난 성공은 아니었지만, 약 1000만 장의 높은 판매고를 올렸고, 1년 뒤인 79년에는 프랑스혁명 기념일에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서 Place De La Concorde라는 제목으로 최초로 대중앞에서 야외 콘서트를 개최하는데, 100만명의 관객이 돌파해서 [[기네스북]]에 올렸고, 1억명 이상의 TV시청을 확보했다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